“치매 치료의 새로운 가능성, 유전자 조절에서 찾다”…조찬희 에피큐어 대표의 도전
길이 세 갈래로 나뉜 Y자 모양의 미로에서 실험용 쥐가 어느 길을 선택하는지는 기억력을 살펴보는 단서가 된다. 방금 지나온 길이 아닌 다른 길을 번갈아 선택하는 비율을 측정하면 동물의 공간작업기억을 평가할 수 있다. 알츠하이머병 연구에서도 활용되는 실험이다. 치매 신약…


길이 세 갈래로 나뉜 Y자 모양의 미로에서 실험용 쥐가 어느 길을 선택하는지는 기억력을 살펴보는 단서가 된다. 방금 지나온 길이 아닌 다른 길을 번갈아 선택하는 비율을 측정하면 동물의 공간작업기억을 평가할 수 있다. 알츠하이머병 연구에서도 활용되는 실험이다.
치매 신약을 개발하는 에피큐어의 연구자료에는 이 미로에서 나타난 변화가 담겨 있다. 정상 쥐의 교대율은 64.5%, 알츠하이머병 모델 쥐는 48.5%였다. 그런데 에피큐어가 개발한 후보물질을 투여한 실험군에서는 67.4%가 측정됐다. 실험군별 동물은 4마리로, 초기 효능을 탐색한 제한적인 결과다. 그러나 회사가 주목한 것은 특정 시험에서 나타난 수치뿐 아니라 신경세포의 기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약물 표적의 가능성이었다.
이 연구를 이끄는 사람은 약학 박사 출신의 조찬희 에피큐어 대표다. 성균관대학교 후성유전체 연구센터 등에서 유전자 발현 조절을 연구해 온 그는 2021년 6월 에피큐어를 설립했다. 기존 치매 치료제와 다른 방식으로 신경세포의 기능을 보호할 수 있는 약물을 개발하기 위해서다.
그가 주목한 것은 뇌유래신경영양인자(BDNF)다. BDNF는 신경세포의 생존과 성장, 시냅스 기능과 신경가소성 등에 관여하는 단백질이다. 기억과 학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알츠하이머병을 비롯한 여러 뇌질환과의 연관성이 연구되고 있다.
조 대표는 이 단백질을 외부에서 공급하거나 수용체를 직접 자극하는 대신, 신경세포가 자체적으로 BDNF를 더 생산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에 집중했다.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바꾸지 않고 발현을 조절하는 후성유전학을 신약 개발에 적용한 것이다.
신경세포가 스스로 단백질을 만들도록 하는 연구
조 대표의 연구 분야인 후성유전학은 DNA의 염기서열이 바뀌지 않더라도 유전자의 발현 수준이 달라지는 현상과 그 조절 원리를 다룬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세포라도 어떤 유전자가 얼마나 활발하게 작동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이 과정에는 유전자 발현과 단백질의 기능을 조절하는 다양한 효소가 관여한다. 에피큐어는 그중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HDAC) 계열에 주목했다. HDAC는 히스톤과 여러 단백질의 화학적 변형을 조절하며 유전자 발현, 세포 기능, 신호전달 등에 영향을 미친다.
조 대표는 성균관대학교에서 약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후성유전체 연구센터를 비롯해 고려대학교 약학연구소와 서울대학교 생명공학연구소 등에서 연구 경험을 쌓았다. 후성유전체 분야의 연구 결과를 국제 학술지에 발표하면서 관련 기술의 가능성을 살펴왔다.
연구자로서 축적한 지식을 실제 치료제 개발에 적용하기 위해 창업한 회사가 에피큐어다. 회사 이름 역시 후성유전학을 뜻하는 ‘Epigenetics’와 치료를 의미하는 ‘Cure’를 결합해 만들었다.
에피큐어가 첫 번째 개발 대상으로 정한 질환은 알츠하이머병이다. 알츠하이머병에서는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의 축적과 타우 단백질의 이상 변화뿐 아니라 신경세포 사이의 연결 손상과 신경염증 등 여러 병리 현상이 나타난다.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만큼 새로운 치료 표적을 찾기 위한 연구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아밀로이드 베타를 표적으로 하는 항체 치료제들이 등장해 초기 알츠하이머병의 진행을 늦추는 치료가 가능해졌다. 다만 치료 효과와 안전성, 투여 방식 등을 둘러싼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에피큐어가 선택한 방향은 아밀로이드 베타를 직접 제거하는 방식과 다르다. 뇌에서 신경세포의 기능을 유지하는 데 관여하는 BDNF의 생성과 조절에 초점을 맞춘다.
BDNF는 신경세포가 새로운 연결을 형성하고 기존 연결을 유지하는 데 관여한다. 뇌질환 환자에서 BDNF 수준의 변화가 관찰된다는 연구들이 있지만, 혈액에서 측정한 BDNF 수치가 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에피큐어는 이러한 생물학적 연관성을 바탕으로 BDNF 생성을 조절하는 약물이 신경 기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고 있다.
조 대표가 선택한 구체적인 표적은 HDAC11이다. 사람에게 존재하는 아연 의존성 HDAC 11개 아형 가운데 하나로, 단백질에 결합한 지방산을 제거하는 작용과 면역·대사·신경 관련 기능에 관여하는 효소다.
에피큐어는 HDAC11을 선택적으로 억제하면 BDNF 생성과 관련된 세포 내 조절 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신약 후보물질을 개발하고 있다. 세포의 유전자 발현과 단백질 기능을 조절해 신경세포의 보호·유지 기능을 높이려는 접근이다.
현재 연구에는 조 대표와 연구원 3명이 참여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연구진과는 분자 모델링과 약물의 작용 기전 등을 연구하고, 건양대학교 의과대학과는 동물 효능 평가, 케이메디허브와는 약동학 및 독성 관련 연구를 협력하는 방식으로 외부 전문기관의 역량도 활용하고 있다.
신약 개발 초기 단계에서 필요한 자금은 정부 연구개발사업을 통해 확보했다. 회사 자료에 따르면 치매극복 연구개발사업 9억 원과 창업성장기술개발사업 3억 원 등 총 12억 원 규모의 정부 R&D 과제를 수주했다. 아직 외부 투자 유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연구개발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11개 효소 가운데 하나를 겨냥한 선택
약물이 원하는 표적에 작용하도록 만드는 것은 신약 개발의 중요한 과제다. 특히 HDAC 계열은 여러 아형이 서로 다른 조직과 세포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특정 효소를 억제하더라도 다른 효소에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에피큐어가 HDAC11의 선택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회사는 다른 HDAC 아형에 대한 영향을 줄이면서 HDAC11을 억제할 수 있는 저분자 화합물을 개발하고 있다.
저분자 신약은 비교적 작은 화학물질을 이용해 체내 단백질이나 효소의 기능을 조절하는 방식이다. 분자 구조에 따라 경구 투여가 가능할 수 있지만, 실제 약으로 개발하려면 흡수와 체내 분포, 뇌혈관장벽 통과 여부, 약효와 독성 등을 검증해야 한다.
에피큐어가 확보한 후보물질 가운데 하나는 ‘EPIC-853’이다. 회사의 자체 효소시험에서 EPIC-853이 HDAC11의 활성을 절반으로 낮추는 농도(IC50)는 0.5μM로 나타났다. 또 50μM 농도에서 다른 10개 HDAC 아형에 대한 억제율이 각각 10% 이하였다는 결과를 얻었다.
이는 회사가 시험한 조건에서 HDAC11에 대한 선택성을 나타냈다는 의미다. 다만 실제 인체에서도 같은 선택성이 유지되는지, 장기간 투여할 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별도의 검증이 필요하다.
연구진은 화합물의 효소 억제 특성에 이어 실제 신경세포에서 BDNF 생성에 변화가 나타나는지도 살펴봤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유도만능줄기세포(iPSC)에서 분화시킨 신경세포에 EPIC-853을 처리한 실험에서는 BDNF 측정량이 대조군 8.3ng에서 22.14ng으로 증가했다. 에피큐어가 신경세포의 BDNF 생성을 조절할 수 있는 후보물질을 확보했다고 판단한 근거 가운데 하나다.
이후 동물실험에서는 같은 연구 계열의 또 다른 화합물인 EPIC-006과 EPIC-008을 평가했다. 알츠하이머병의 일부 특징을 나타내는 3xTg 모델 쥐를 이용해 Y자 미로에서 공간작업기억과 관련된 행동 변화를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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